[재혼! 이왕 할 거라면 준비를 하는 편이 낫습니다]
마흔의 나이. 공자는 이 나이를 ‘만사에 의혹됨이 없는 불혹’이라고 했다는데, 나는 당시 ‘불혹’이 잘 되지 않았다.
‘내가 과연 잘 하는 결정일까?’, ‘아이들은 잘 키울 수 있을까?’
한 마디로, 재혼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기에 생긴 의혹이었다.
아이 없이 짧게 끝난 내 결혼 생활의 종지부는 ‘비밀’이었다. 나는 철저하게 이혼을 숨겼고, 자유로운 내 모습만을 노출해주었다. 그랬기에 가족을 제외한 지인들에게 내 결혼생활은 ‘모범적인 딩크족’ 쯤으로 보였는지 나를 보면 남편의 안부를 색다르게 물어보았다.
‘자유 남편은 잘 계신지?’
나는 엉거주춤한 웃음으로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러면서 뒤로는 부모님의 채근을 무지하게 들어야 했다.
‘하루라도 젊을 때 결혼해야 애를 낳지.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결혼? 그 까짓 것, 싶었다. 한 번 해봤으니 됐다 싶기도 했다. 근본적으로는 의처증이 있었던 첫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남겨 준 악몽이 너무 컸다. 철저하게 자유를 통제 당했던 그 생활. 나는 그런 생활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마흔을 목전에 두고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혼한 첫 남편과 같은 지역에 사는 것도 일종의 스트레스였기에 늦은 나이였지만, 서울 행은 쉽게 이루어졌다. 이사를 한다고 하니 친구들은 걱정된 표정으로 말했다.
‘얘! 남편이랑 오래 떨어져서 살면 정이 멀어진대. 빨리 내려오도록 해야지’
나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서울에 가보고 좋은 사람 있으면 새로 결혼하지 뭐.’
친구는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결혼도 양다리가 있나?’하는 말과 함께.
나는 서울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연결고리가 없는 타향살이가 싫어 별수 없이 향우회를 나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남편은 고향 이웃 마을의 선배였다. 학창 시절에도 착했던 남편. 선생님들께서 ‘쟤는 성실해서 어떻게든 잘 살 거야’했던 그 선배는 홀아비였다. 내가 가진 홀아비라는 선입견은 ‘우울’이었는데, 그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모임에 나오면 사소한 것도 챙기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조금은 무신경한 내 눈에도 보였다.
내 눈에 콩깍지가 씌려고 그랬는지 그런 그에게 관심이 생겼고, 나는 그가 가입한 재경 동창회도 가입하여 모임에 참석했다.
향우회에 나온 고향 선후배들의 입을 빌려 나는 그의 근황을 조금 더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중소기업의 차장. 두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갖고 있는 것은 수도권에 위치한 크지 않은 아파트 한 채가 전부라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나는 그런 조건은 그리 따지지 않았다. 매사에 내게 군림하며 의심 병을 갖고 있던 첫 남편과 반대되는 부드러움만 생각했다. 또한 학창 시절에 선생님들께서 평한 평가만을 기억했다. 그것은 남자에 대하여 느끼는 믿음이었고, 내 나름의 사랑이 시작된 것이었다.
모임이 있었던 어느 날, 끝나고 돌아가는 그를 불렀다.
“제가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나는 성격상 얘기를 에둘러 하지는 못한다. 그날도 내 표현은 직설적이었다.
“저, 어떠세요? 선배도 결혼은 해야 되잖아요.”
그의 표정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하는 표정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눈치를 챘다.
“제가 실은 이혼한 지 꽤 되었거든요. 숨기다 보니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는 돌아서서 나갔다. 대답도 듣지 못하고 집으로 오면서 나는 오기가 발동해 버렸다.
‘나는 애도 없는데 지는 애가 둘이나 있고, 내가 먹고 놀자는 것도 아니고 돈도 벌 건데, 그리고 자기 처지에 내 정도면 괜찮을 텐데 대답이 없어. 내가 참.’
그 다음부터 나는 그를 일부러 외면했다. 2개월 동안 두 번의 모임에서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리고 효력은 나타났다. 이번에는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많이 생각해봤는데 너라면 나도 결혼하고 싶어. 그런데 내 조건이 너한테는 맞지 않을 것 같아서 말야. 내가 애가 둘이나 있어. 너는 애도 없던데 애를 키울 수 있어? 그리고 우리 작은 녀석은 조금 애를 먹이는 편이고 나는 알다시피 돈 버는 실력도 변변찮은데”
나는 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어린 아이가 애를 먹여봐야 그 수준일 테고, 돈은 그 정도의 직급이면 도시 근로자 평균 소득 정도는 받겠지.’
그리고 명쾌하게 대답해 주었다.
“괜찮아요. 제가 애가 없으니 선배 아이들을 더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돈은 저도 벌면 되요. 직장은 계속 다녀도 되죠?”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나는 그와 함께 아이들을 만났고, 가끔은 그의 집에 가서 작은 아이와 놀아주기도 했다. 아이는 나를 잘 따랐다.
“아줌마가 우리 엄마면 좋겠어요?”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하지?”
“컴퓨터 게임도 잘 하고 돈도 잘 버는 것 같고, 예쁘고 날씬하고.”
‘오호라. 쬐그만 녀석이 여자 볼 줄 도 아네’ 하면서 나는 내심 흐뭇해했다.
아이들과 융화되지 못해 재혼에 실패하는 사람도 많다는데 이 정도면 성공이다 싶었다. 반면, 큰아이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좋다 나쁘다는 의사표현도 하지 않았다. 나와 그는 그것을 ‘ok'로 받아들이고 결혼 준비를 서둘렀다. 남편의 프러포즈는 간단했다.
‘지금도 사랑하지만 앞으로 더 많이 사랑하며 살 것이고, 예전에 눈물을 흘렸다면 앞으로는 흘리지 않아도 되게 해줄게’
나는 감동했고, 결혼을 서둘렀다. 하루라도 빨리 이 남자랑 살아야만 더 많이 행복해질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다 내게 온 행복이 부웅~ 하며 떠나가 버릴 듯한 조바심이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지나친 서두름’이었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조급증과, 혼자서 마흔이 되는 것을 겁냈던 나의 조바심이 결혼을 서두르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시댁에서는 무조건 환영이었다. 친정에서는 반대였다. 아버지의 생각으로는 집안간의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그가 가진 조건이 문제였다. 향리에서 유지로 행세하시는 아버지께 농사를 짓고 계신 시아버지는 탐탁치 않은 사돈자리였다. 나는 결혼을 강행했다. 재혼이라 별다른 절차가 필요 없었다. 남편은 어떻게든 결혼식이라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절차를 유달리 따지던 아버지보다는 실리적으로 살아가는 시아버지의 생활 방식이 더 좋아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제는 내 살림이니 돈도 아껴야 했다. 그와 나는 웨딩 스튜디오에 가서 사진을 찍고 구청에 혼인신고를 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체했다. 혼수는 남들처럼 모두 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두 아이의 몫도 챙겼다는 거였다.
마흔이 되기 직전에 나는 그와 결혼하여 아내가 되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직장은 당분간 쉬기로 했다. 그것은 내가 시도한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고, 그 만큼 기대도 많았고 두려움도 있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사실로 나타났다.
[재혼! 두 사람의 사랑에 노력이 보태져야 합니다]
재혼에 대한 마음 준비를 미리 하고 있지 않아서였는지, 재혼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서였는지 나의 재혼 생활도 영락없이 암초가 있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하나 둘 터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기분은 신혼인데 시작은 결혼 10년쯤의 권태기로 시작되는 듯한 분위기가 <첫 번째 문제>였다. 둘만 지낼 시간은 아예 없었다. 항상 두 아이와 함께 지내는 생활이라 ‘오붓한 신혼’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두 번째 문제>는 아이들의 문제였다. 딸아이는 노골적으로 내게 ‘아줌마’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아들이 ‘엄마’라는 말을 아주 쉽게 하기에 딸아이도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내 기대일 뿐이었다. 딸아이에게 있어서 나는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아줌마,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아들아이는 남편이 결혼 전에 말한 대로 문제가 있었다. 지독한 게임 중독이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선택의 방법이 없었다. 나는 ‘열심히 살자’는 생각으로 아이들과 남편에게 올인했다. 시간이 흐르면 내 진심을 알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아들의 게임 중독은 여러 증세를 동반했다. 거짓말, 약속 어기기, 돈 훔치기, 밤새고 귀가하기, 학교 성적은 당연히 바닥이었다. 하루는 새벽 1시에 귀가를 했기에 꾸중을 좀 했다. 그랬더니 아들의 반응이 파격적이었다.
“새엄마는 원래 야단치는 거 아니에요. 새엄마는 그냥 오냐 오냐 하는 거예요.”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새엄마라는 개념을, ‘밥 잘 해주고, 돈 잘 벌어오고 잔소리하지 않는 고급 보모’쯤으로 인식한 아들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고쳐야 하나 한숨이 나왔다. 아마도 주변의 어른들이 하는 말씀을 듣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 중심에는 내 결혼생활의 <세 번째 문제>가 된 시어머님과 둘째 시숙이 계셨다. 둘째 시숙은 내게 대놓고 무시하듯 잔소리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시숙께서 ‘여자의 재혼’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이는 행동이셨다.
‘제수씨! 애들한테 엄마 소리 들을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잘 키우기나 하세요’
‘애들 기죽이지 마세요.’
‘밥이나 잘 해주고, 살림만 잘 살면 됩니다’
반면, 아이들에게 ‘엄마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말씀은 단 한번도 없으셨다. 거기에다가 시어머님은 나를 앉혀두고 예전 며느리 얘기를 잘 하셨다. 내가 아이들과 어떻게 잘 지낼 것인지에 대한 말씀은 한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 얘기가 좋은 얘기일 때도 있었고 나쁜 얘기일 때도 있었는데, 끝마무리는 항상 똑같았다.
‘00어미 비위 건드리지 말고 죽은 듯이 살아라. 애들 밥은 절대 굶기면 안 되고.’
남편의 전처가 집으로 전화하는 것도 내가 비위를 건드려서 그렇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어쩌다 휴일에 일을 하느라 밖에 있으면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애들 밥은 어쩌고 거기 있냐? 네가 그렇게 애들 굶기고 나가 있으면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예전 아이 엄마가 밖으로 도느라 아이들 밥을 거의 챙겨주지 않았다더니, 어머님께서도 그 일에 한이 맺히신 듯 했다. 그저 밥, 밥 이었다. 남편도 가끔 내게 말했다.
‘애들 성적이 오르게 노력 좀 해보지’
나는 갑자기 추락해버린 내 자리가 생소해져 버렸다. 보모, 파출부, 과외 교사.
<네 번째 문제>는 경제적 문제였다. 남편에게 연봉이 얼마인지 물어보지 않고 내 나름의 추측만으로 수입을 예상한 내 실책은 너무 컸다. 남편의 보수는 도시 근로자 평균 보수보다 훨씬 적었다. 거기에다가 전처가 이혼 하루 전날에 아파트를 담보로 몰래 대출을 해간 탓에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은 140만원이 고작이었다. 이 돈으로 아이 둘을 키워야 하다니 한숨이 나왔다. 아파트에 잡혀 있는 담보액도 만만찮은 금액이었다. 그러니 아파트 명의는 남편의 것인데, 온전히 남편의 것이 아닌 은행과 공동소유라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남편의 성실성 하나만을 믿고 결혼을 했던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다섯 번째>는 남편의 전처 문제였다. 긴 외도 끝에 남편과의 이혼을 택한 전처는 남편의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집으로 전화를 했다. ‘~년’ 정도의 욕은 애교에 속할 정도였다. 욕은 삼가 달라고 부탁하자, 전처는 억울해서도 욕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외도하여 이혼하긴 했지만, 얼마든지 재결합의 여지가 있었는데 내가 남편과 결혼하는 통에 그 여지가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 억울하다고 했다. 이혼한 지 3년이 넘은 이혼 부부가 어찌 재결합을 하느냐는 내 물음도 그녀의 한마디에 묵살되어 버렸다.
‘우리에게는 두 아이가 있어. 천륜이거든’
그때서야 나는 알았다.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내 남편의 두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는 것을. 남편의 전처는 몇 달에 걸쳐 내게 전화 공세를 폈다. 그냥 조용히 물러나라. 애들이 나중에 너랑 살 것 같으냐? 낳은 엄마가 살아있는데 어림없다. 고생하지 말고 일찍 정리해라. 반은 애원이었고, 반은 협박이었다. 전화번호를 바꾸고 싶었지만 남편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남편은 아이들이 헷갈려 할까 봐 집안의 구조 바꾸기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아이들을 배려한 남편의 행동이 내게는 비수처럼 아팠던 결혼 초반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재혼의 전제 조건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서둘러 결혼했다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 그때 내가 깨달은 재혼의 전제 조건은 다음과 같다. 물론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것이다.
<첫째>, 시댁이 얼마나 화목하며 가족의 성격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한다.
가족의 성격이나 화목度는 아이들과 남편의 인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내 결혼생활을 지배한다. 나는 시어머님의 독단적인 성격을 둘째 시숙님이 그대로 갖고 계셔서 적응하느라 힘이 들었다. 반면 시아버님과 큰 시숙님께서는 짚을 것이 없을 정도로 원만한 성격이시다.
<두 번째>, 경제적 문제는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남편의 현재 재산 상태, 채무관계, 보수, 앞으로의 수입 등에 관하여 확실히 아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혼 전에 돈 얘기하는 것을 꺼리는데 내 경험으로 볼 때 무조건 짚어야 하는 문제이다.
<세 번째>, 남편의 성격이나 취향, 사고방식은 나와 얼마나 일치할까이다.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생활을 해 본 사람이기 때문에 예전에 알던 사람이라도 많이 바뀌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와 일치하는 면이 많으면 결혼을 결정해도 좋을 것이다
<네 번째>, 전 배우자와의 헤어진 이유와 관계 정리가 확실하게 되어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전 배우자의 외도로 헤어졌다면 남자는 여자의 바깥 활동에 조금 소극적이게 되어 있어 재혼한 아내의 입장에서는 처신이 조심스러워진다. 그리고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 전 배우자의 폭언이나 간섭도 받게 된다. 아이들은 교류를 하더라도 남편은 전 배우자와 관계를 확실하게 매듭짓는 것이 재혼하는 여자들을 배려하는 가장 좋은 정리법이다.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이혼하고서도 쿨한 관계를 유지할 이혼 부부는 아직까지 사회 여건상 잘 되지 않는 듯하다.
<다섯 번째>, 결혼생활중의 경제관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가 협상되어야 한다.
나는 남편과 이 문제를 전혀 의논하지 않았는데 커다란 실책이었음을 이내 알게 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약속 사항이다. 의논을 않고 결혼한 결과, 첫 달에는 50만원, 두 번째 달에는 80만원을 주기에 은행 대출 갚아 들어가는 것 외의 금액을 모두 달라고 요구했다. 되든 안 되든 살림은 여자가 하는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재혼하는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경제권을 잘 맡기지 않는 경향이 첫 결혼 때보다 비중이 높다고 한다. 이 부분은 결혼 전에 짚어놓아야 재혼여성들이 자기 권리와 의무를 병행하는데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내가 미처 짚지 못했던 위의 다섯 가지 문제로 하여 유발된 나만의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기로 했다.
<첫 번째 문제>는 남편과 의논하여 1개월에 2번의 부부 타임을 갖기로 했다. 집에서 가까운 레스토랑이 우리의 부부타임 근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2개월에 한 번 정도는 근교로 가벼운 드라이브를 다녀오는 것으로 ‘신혼 분위기 유지 및 애정 다지기’를 하기로 결정했고, 지금까지 잘 지켜오고 있는 중이다. 요즘은 딸아이가 우리를 더 밀어내고 있다.
“두 분이서 오붓하게 1박 2일 여행 좀 다녀오세요. 우리끼리 잘 지낼 수 있으니 집안일은 염려하지 마세요”
덕분에 지금까지 세 번의 1박 2일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두 번째 문제>인 아이들의 문제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딸은 처음에는 조금 냉소적이고 배척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내 나와 마음을 터놓아 누가 봐도 모녀처럼 지내게 되었다. 딸아이의 말로는 ‘새엄마’여서 자기 실속만 챙길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너무 좋다고 했다. 올인하는 마음으로 결혼생활에 전력투구한 보람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셈이었다.
그런데 아들은 처음의 OK와는 달리, 1년의 시간 뒤에야 또래의 아이와 비슷한 형태로 생활을 꾸리게 되어 가족 모두 마음고생이 지난했다. 그래도 그 날들을 넘기고 나는 지금 두 아이 모두와 아주 잘 지내고 있고, 보편적인 엄마와 자식의 관계로 살아가고 있다.
<세 번째 문제>인 시어머님과 둘째 시숙님과의 문제는 한바탕 회오리 끝에야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지난 추석에 이 문제에 대하여 공손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이의를 제기했다.
내가 받은 상처를 가늠하지 못한 두 분은 내게 ‘참을성이 없다. 이해심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시누이와 큰 시숙님의 객관적인 비판으로 두 분께서는 이제 내게 비수 돋친 말씀은 하지 않으신다. 나 또한 이제는 잊어버리고 지내려 노력하는데, 아주 가끔은 생각이 나기도 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어 다행이다. 고마운 것은 이런 일들에 남편과 딸아이가 전적으로 내 입장을 헤아려 주었다는 것이다. 내 편이 있다는 것. 네편 내편으로 갈라선 싸움을 하며 살아야 할 삶은 아니지만, 내 편이 있다는 것은 든든해서 너무 좋다.
<네 번째 문제>인 경제적 문제를 나는 내 친구들로부터 욕을 얻어먹으면서 해결해 버렸다. 아파트에 걸려있던 은행 대출금을 결혼 전에 내가 벌어두었던 돈으로 갚아 버렸던 것이다. 친구들은 ‘비상금처럼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고, 친정 엄마조차도 ‘만약에 다시 이혼하게 되면 어떡할 거냐?’는 염려를 하셨다.
그때 나는 말했다.
“한나라 때 한신이 쳤다던 배수진을 나도 한 번 치는 거야”
내 수중의 돈(남편이 몰랐던 돈이었다)을 모두 털어 빚을 갚던 날, 남편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많이 울었다. 그런 남편에게 나는 말했다.
“이제 당신 돈이 우리 돈이고, 제 돈이 우리 돈이잖아요? 같이 살아야죠.”
남편은 대출금을 갚던 금액만큼을 생활비로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모자라는 생활비는 파트타임 강의를 나가면서 채워 넣었다. 경제적 문제는 이렇게 해결이 되었다.
<다섯 번째 문제>인 남편의 전처이자 아이들의 생모 문제는 딸아이가 해결을 했다. 결혼 후 몇 달이 지나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 딸아이가 핸드폰을 가지고 왔다.
‘엄마! 핸드폰 번호 바꿀래요.“
나는 놀라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딸아이의 입에서 처음으로 ‘엄마’라는 단어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걸음 물러나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딸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엄마라고 부르려고 해요. 예전부터 불러드려야 했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아서 못했어요. 그 동안 고생하셨는데 서운하게 해드려서 죄송했어요.”
나는 하늘이 아주 파랗게 열리는 경험을 그때 해보았다.
“엄마라고 부르는 거는 부르는 건데, 갑자기 핸드폰 번호는 왜 바꾸니?”
“전화가 오는데 자꾸 욕을 해서요. 그냥 번호 바꿀래요”
나는 처음부터 두 아이에게 못을 박아놓은 것이 있었다.
“예전 엄마와 통화하거나 만나는 것은 자유롭게 해도 된다. 다만, 그 기분을 집에 가져오지는 말아라. 좋든 싫었든 밖에서 만나고 밖에서 끝내야 한다‘”
그런데 딸아이는 아예 번호를 바꾸고 싶다고 했다. 집으로 전화를 하지 못하게 하자, 딸아이의 전화가 화풀이 대상이 된 듯 했다. 나는 딸과 아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예전 엄마와 만나고 싶지 않니? 전화 통화도 싫니?”
두 아이는 그렇다고 했다. 나는 다시 물어보았다.
“정말 너희들이 싫다면 핸드폰 번호도 바꾸고 집 전화번호도 바꿀 거야. 물론 이사도 해야지. 지금까지 너희들이 헷갈릴 까봐 그냥 살았거든. 대신 나중에 만나고 싶으면 얘기해. 만나게 해 줄 테니까.”
그때 딸아이가 말했다.
“엄마! 우리는 엄마가 좋아요. 예전 엄마는 그리 보고 싶지도 않고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지금 이 상태대로 사는 것이 좋은데 뭘 여지를 남기려고 하세요?”
그때 딸의 핸드폰이 울렸다. 딸은 냉정하게 전화를 받았다. 그것이 나를 스트레스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는 것을 딸은 알았던 모양이었다.
“앞으로 전화하지 마세요. 우리가 싫다고 나갔으니 그곳에서 그냥 열심히 사세요. 우리는 여기에서 충분히 행복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나는 아이들의 핸드폰과 집 전화번호를 교체했고, 더 이상 전처의 전화 횡포는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때서야 우리 집은 일정 부분의 긴장감을 걷어내고 웃음의 활개를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