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냥공장 옆에 있는 작은 기와집에서 살았다. 피난시절에 지은 아주 낡고 허름한 집이었다. 모두 여덟 명의 식구들이 모여 살았는데 풍족하진 않지만 가족의 소중함과 따뜻함이 있었기에 별다른 불만들이 없었다.
나는 아침마다 성냥공장 옆을 지나서 학교에 갔다. 성냥공장에는 수십 명의 여공들이 머리에 하얀 두건을 쓰고 공장 안을 들락거렸는데, 내가 공장 앞을 지나가노라면 부러운 눈길로 한참씩들 쳐다보곤 했다. 나는 여공들의 그런 부러운 눈길을 은근히 즐겼다. 그녀들은 성냥공장 여공들이고 나는 장차 시인이 될 갈래머리 여고생이었던 것이다. 풀 매긴 교복을 빳빳하게 다려 입고 한 손에 김수영 시집을 든 나는 누가 봐도 예쁜 여학생이었다. 도도한 낭만으로 오만하기까지 했던 열아홉의 나를 두고 어젯밤의 불길한 꿈처럼 부정한 생각을 하는 가족과 친구들 또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 집 앞을 기웃거리던 한 남학생을 알게 되었다. 눈길조차 건네지 않았던 그 남학생에게 서서히 끌리기 시작한 것은 그가 내게 건넨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확실한 정보가 있었던 것인지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수영 시인의 시를 적어서 보냈다. 나는 그와 함께 시를 읊고 문학을 얘기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과 현실에 대한 걱정보다 그와 함께 있고 싶다는 절절함이 더 컸다. 가족과 친구들이 그건 미친 짓이라고 호되게 말렸지만, 당시에는 왜 무엇이 안 된다는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사랑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남학생과 동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달 밝은 밤 툇마루에 앉다 사랑의 시를 읊자고 한 맹세가 가시기도 전에 아이가 태어났다. 그제야 나는 너무 일찍 사랑을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밀린 사글세와 아이의 우유 값도 문제지만 사랑의 시를 잃어버리고 허둥거리는 그 사람의 폭력적인 행동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는 나와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 구속하고 통제하는 내가 미워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나 역시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현실이 견딜 수 없었지만 내겐 방긋거리며 웃는 아들이 있었기에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시집을 읽는 대신 부업을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부업은 뭐든지 다 했다. 남편이 집을 나간 지 몇 해가 되었는지 손꼽을 여유조차 없이 사는데 매달려야만 했다. 얼마만큼의 세월이 지났을까. 나는 더 이상 남편을 기다리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실종신고와 함께 이혼절차를 밟았다. 다행히 큰 무리 없이 이혼을 할 수 있었고, 아이도 아빠의 빈자리를 크게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아직 이혼녀에 대해 그다지 너그러운 편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수록 주위의 부정적인 관심과 걱정이 나와 아들을 그냥 살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혼의 기억조차 낯선 내게 또 다시 결혼하라는 소리는 두 번 죽으라는 소리였다. 나는 절대로 그런 실수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텼다. 아니, 남자에 대한 믿음이 생기질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는 친정엄마의 눈물 어린 호소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껏 딸 노릇 한번 못한 것이 너무나 죄스러워서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소개한 시골 총각을 만나게 되었다. 두 번째 결혼이었던 것이다. 그는 한 눈에도 소박한 시골 노총각이었다. 세련되고 영리한 것과는 담을 쌓은 듯 우직하고 성실해 보였다. 어쩌면 저런 사람이 내게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나는 섣부른 판단을 해버렸다. 시 나부랭이나 읽고 술과 친구를 더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경제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 사람한테는 적잖은 논과 밭이 있고, 내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큰 배려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더없이 고맙게 생각되었다. 새끼까지 달린 나를 그것도 총각이 받아주겠다는데 튕길 일이 뭐 있나 싶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나와 내 가족들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엄마는 이제야 사위를 본 것 같다고 식을 올리기 전부터 아예 가족으로 인정해 버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처음으로 신혼여행이라는 것을 가게 되었다. 너무 무지하고 거칠어서 가끔은 답답하고 외로웠지만, 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그를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나는 논과 밭으로 일 나간 그를 위해 밥을 짓는 농부의 아내로 살았다. 뭔가 잃어버린 듯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올 때도 있었지만 아들의 대학등록금을 챙기고 엄마의 생일상을 위해 마늘 판 돈을 아낌없이 건네는 그 사람이 고마워서 아무런 내색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지도 모른다고 또 그렇게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착각 역시 오래 가지 않았다. 그의 장점만 보려고 아무리 노력하고 다짐해도 내 마음이 온전히 그에게 다가가지지 않는 것이었다. 농사일 외에는 자신의 이름조차 똑바로 쓰고 말하지 못하는 그에게 나는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밤마다 나는 그의 무지하고도 왕성한 성욕을 채워주기 위해서 산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연한 문제가 내겐 치욕스럽게 느껴지면서 하루라도 빨리 그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 누구에도 상의하지 않고 통고하듯 그에게 이혼을 주장했다. 그의 반응은 실로 무섭고도 집요했지만 나는 번복하지 않았다. 진짜 더 이상은 누구의 인생에 업혀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깨달은 것이다.
이제 내 나이 쉰에 접어들었다. 여전히 단칸방에서 가난하게 살지만, 내겐 곧 대학을 졸업할 사랑하는 아들이 있다. 남들은 그 애가 내 희망이고 삶이라고 말하면 틀린 소리라고 하지만 아직은 버틸 만하다. 나는 지금까지 두 번의 결혼을 통해서 많은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늦었지만 아픔 이상으로 현명하고도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 성냥공장 옆에 살던 그 도도했던 갈래머리 소녀에서 폐경을 맞은 중년의 여인으로 변한 것이다.
외롭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식당이 파하고 퉁퉁 부은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서 나는 시집을 읽는다. 시집을 읽지 않으면 죽을 만큼 외롭다. 사람들은 또 나를 흔들 것이다. 사랑이 아닌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결혼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할 것이다. 현실이 아닌 꿈꾸는 사랑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