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월 5일. 내 나이 28살. 결혼한 지 5년 만에 이제 막 4살 된 아들 녀석의 손을 잡고 이혼법정을 나오던 나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을 눈비가 내려 대신 가려 주었다. 그때 당시 은행원이었던 나는 뜻하지 않게 이혼이라는 아픔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아이를 키우며 당당히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만은 강했다.
한번 결혼에 실패했었던 사람이고, 10년이라는 나이 차이 때문에 부모님의 심한 반대로 부모님과는 거의 인연을 끊다시피 하면서 둘만이 초라하게 출발한 결혼생활이었는데, 나보다 더 좋은 인연을 만났다며 아이까지 냉정하게 포기하고 돌아서던 그 사람을 잡을 용기가 없었다. 피눈물을 흘리고 계실 부모님과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는 아이의 맑은 모습을 보면서 나는 웃어야 했고, 일어서야 했다.
현실에 조금씩 적응하려 할 무렵 IMF라는 장벽이 퇴출 0순위에 나를 올려놓았고, 하루아침에 나는 실업자가 되어 앞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퇴직금으로 장사나 한번 해 볼까?’ 아는 분의 권유로 작은 옷 가게를 열었던 나는 경험부족으로 6개월 만에 결국 문을 닫았고 나에게 남은 건 살고 있던 전셋집이 전부였다. 다른 일들을 찾아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어 보았지만 경력과 실력 앞에 가로막는 것은 이혼녀라는 현실의 벽이 늘 따라다녔다.
보험회사, 출판사 영업, 사무실 경리 등등 나의 직업은 수시로 변해갔고, 남들에게 나의 단점을 들키지 않으려고 나 자신에 대한 포장을 하면서부터는 급기야 자신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얼마 동안을 힘들게 보내다 옆집 아주머니를 따라 파출부 사무실 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나는 포장이사 현장에 나가서 주방 일을 도와주는 도우미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조금은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이 일하는 곳이라 한 마디, 한 마디 오가는 말들이 따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분당에서 제일 잘 된다던 포장이사 사무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젊은 사람이 일을 참 꼼꼼하게 잘한다고 고객들이 칭찬을 많이 하시던데, 저희 사무실에 출근해서 포장이사 견적 보는 일과 상담 받는 일 해보시지 않을래요?”
새로운 도전이었다. 일을 배우면서 자신 있게 상담을 하고, 견적 약속을 받아내고, 계약을 해내는 일은 나 자신도 놀랄 만큼의 결과를 가져 왔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내 자리만 잘 지키면 되는 거야.’ 새로운 각오로 힘이 생겨났다.
2000년 6월 13일. 회사에서 야유회를 간단다.
어느 계곡을 야유회 장소로 잡았다는데 너무 멀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이 핑계를 이유로 빠진다는 게 쉽지가 않아 일단은 직원 차에 올랐다.
얼마 만에 이런 곳에 와 봤던가. 하늘 한번 여유 있게 쳐다보지 못하고 달려왔던 나에게 푸른 자연은 또 다른 세상처럼 두 팔 벌려 나를 맞이해 주었다.
‘맘껏 즐기고 돌아가라고, 마음속에 그늘이 있다면 이 자연 속에 버려두고 돌아가라고…’
산들바람에 흔들이는 풀잎들과 조용히 흐르는 계곡물은 분명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의 남편을 만난 건 이 날이었다. 야유회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약간의 음주.
하지만, 나는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하는 수준이었고, 직장 상사의 권유로 한 모금을 받아 마시기는 하였는데, 어질어질 머리도 아프고 온몸도 달아 오르고…
그늘진 곳을 찾아 쪼그리고 앉아 시계만 쳐다보았다. ‘4시에는 출발해야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있는데, 벌써 3시가 넘었네. 버스를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콜택시를 부르면 여기까지 올까? 혼자서 발을 둥둥 구르고 있을 때, 지금의 남편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안면은 있었지만 그는 현장 팀장이었고, 나는 사무실에서 근무를 했던지라 말을 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저, 최민철이라고 합니다. 우리 구면이죠? 사장님한테 이야기 많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아이 데리러 놀이방에 가야 하죠? 여기는 버스를 타려면 30분은 걸어서 나가야 합니다. 길도 모르실 테고 제가 놀이방까지 태워 드릴 테니 일어나시죠.”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덜컹덜컹. 산길인지라 차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안전벨트 안 매시면 차 밖으로 튕겨 나갈지도 모릅니다.”
“호호호” 그의 유머에 나는 웃었다. 아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고 할까?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시작이 되었다.
“사장님 말씀으로는 우리 동갑이라고 하던데 나랑 친구 할래요?”
그의 말 속에는 힘이 있었다. 당당한 그의 모습이 부러울 정도로 말을 잘했다.
“저하고 친구를요? 저 하고 친구하기에는 제가 많이 부족한데…”
“친구 하는데 무슨 조건이 있나요? 그리고 사장님한테 이야기 대충 들었습니다. 제가 그 쪽한테 관심 있다고 사장님한테 다리 좀 놓아 달라고 졸랐더니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말씀 해 주셨습니다. 자존심을 건드렸다면 죄송하지만 기분 나빠 하지는 마세요. 요즈음 세상에 이혼한 게 뭐 문제 되나요? 자신 있게 사는 모습에 감동 받았잖아요. 하하하”
이렇게 그와 나는 친구가 되어 퇴근 후면 아이랑 같이 저녁도 먹고, 산책도 즐겼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또 다른 행복이었다.
책을 너무 좋아해서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내 손에 쥐어야 하는 나와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신작이 나오면 무조건 영화관을 찾아야 하는 그.
주말이 되면 서점과 영화관에서 하루를 다 보내는 즐거움이 계속되었고,
“어머! 아이가 아빠를 쏙 빼 닮았어요.”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에 그는 기분 상해 하지 않았다.
‘아빠 아닙니다.’라는 내색을 한번도 하지 않고, 아이에 대한 배려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 조금은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의 시간을 너무 뺏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그에게 이야기를 했다.
“너는 여자친구를 만들어서 데이트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하는데 나와 아이한테 시간을 너무 많이 주는 것 아니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니까 네 생활 만들어.”
나는 애써 그를 멀리하려 노력했다.
가슴 한 곳에 자리 잡았던 그를 놓아주려니 순간순간 찾아오는 허전함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를 친구라는 이유로 내 옆에 너무 붙잡아 두는 건 내 욕심인 것 같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일요일.
아이랑 단둘이 집안에서만 놀고 있었는데 거실에서 놀던 아이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다. 넘어졌는데 다리가 아프다며 일어서지를 못하는 아이를 안고 비를 맞으며 응급실로 달려가 엑스레이 촬영을 해 보니 정강이뼈에 골절이 심하게 되어 깁스를 하고 2달은 있어야 한단다. 앞이 캄캄했다.
시골에서 농사일에 정신이 없으신 칠순 노모한테 아이를 부탁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내가 직장을 그만 두면 당장 생활에 어려움이 찾아 올 테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음날 출근을 해서 사정 이야기를 한 뒤 사직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혼 할 때도 오늘처럼 힘들지는 않았는데… 이럴 때 친구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내 생각이 그에게 까지 전달이 되었나? 한밤 중에 울리는 전화벨소리. 그였다.
“호승이(우리 아이) 자니?”
“응. 근데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잠깐 나와라. 할 이야기가 있어.”
커피숍에 가서 커피 마시는 돈이 제일 아깝다던 그가 분위기 좋은 커피숍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곤 한번도 보지 못했던 심각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아이가 다쳐서 회사 그만 뒀다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니?”
“방법을 생각 중이야. 지금은 아이 옆에 있는 게 먼저인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널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봤어. 너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방 하나 비어 있지? 그 방 나한테 세놓고, 그 세 받아서 당분간 생활하면 되잖아. 불편하게는 안 할게.”
나의 대답은 들어 보지도 않고, 다음날 퇴근 무렵 용달차 한대가 집 앞에서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짐을 옮겨 오는 것이었다.
당황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여하튼 그의 짐은 내 집안으로 옮겨졌다.
두 달이 지나 아이가 깁스를 풀던 날 전에 다니던 회사의 사장님이 찾아와 다시 출근해 줄 것을 부탁했다. 나에 대한 배려를 해 준거였다. 너무너무 감사했다.
“나도 결혼을 약속하고 5년 동안 사귀던 여자가 있었어.”
어린 나이 때부터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심에 대학교 졸업하고 전공하고는 상관없이 사업이란 걸 시작했지만, 몇 번 실패를 하고 결국 이삿짐 나르는 일을 시작하게 되자 나한테는 자신의 미래를 도저히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없다면서 떠나더라. 얼마 전에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 5년 사랑하다가 헤어진 거와 5년 결혼생활 하다가 헤어진 거나 종이 한 장 차이야. 그리고 네가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아. 우리 부모님께는 내가 널 마음에 두면서 조금씩 말씀을 드렸어. 처음엔 많이 놀라시고 우시기만 하시더니, 내가 살아온 삶이 너무 힘들었다는 사실을 아시기에 진정 내 선택이 행복의 길이라면 받아들인다고 허락해 주셨어. 너하고 아이하고 한번 만나보고 싶대. 매번 나 혼자 결정하고 너는 따라오게 해서 미안한데, 너라면 적어도 내가 힘들 때 날 먼저 떠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
나 역시 너와 아이한테 같은 이유로 상처주지는 않겠다는 약속만큼은 꼭 지켜 줄게. 너와 나의 삶에 나와 나란히 손잡고 모험 한번 해 보지 않을래?”
2000년 12월 13일.
서른 살의 총각이었던 그와 서른 살에 애 딸린 이혼녀로 살아가던 내가 부부가 되어 새 삶을 출발하였다.
수원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우리는 내가 혼자였을 때 살던 전세집 보증금으로 포장이사 사업을 시작했다. 둘 다 경험을 살려 열심히 일했다.
새벽 6시가 되면 일어나 아이의 밥과 유치원 옷을 챙겨 놓고 남편과 현장으로 가서 일을 하다가 8시가 되면 전화로 아이를 깨워 유치원에 보냈다.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남편은 저녁시간으로 미루어 놓았던 견적을 보러 갔고, 나는 직원들 저녁준비를 하였다.
하루 종일 엄마를 기다렸을 아이랑 시간을 보낸 후, 밤 12시가 되면 가방 한 가득 광고지를 넣고 아파트에 광고를 하러 갔다가 새벽 3시 정도에 집으로 돌아와 잠깐 잠을 잔 후, 6시가 되면 또 일어나서 현장으로 일을 하러 나가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
쓰러질 정도로 힘이 들었지만, 나 혼자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노동이었고,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좋았기에 행복했다.
넓은 사무실로 이사를 하고, 차량도 늘어나고, 직원도 늘어 갔다.
그런데…조금씩 남편이 직원들한테만 일을 맡기기 시작하면서, 인터넷 온라인 게임에 빠져 헤어 나오길 못했다. 밤새 게임을 하나가 낮이 되면 자고, 게다가 게임아이템인지 뭔지를 사야 한다며 돈을 쏟아 부었다. 직원들도 사기가 떨어 졌는지, 현장에서 잦은 사고가 일어났고, 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들이 많았다. 결국 2년 만에 3천만 원의 빚만 안고, 모든 걸 포기해야 했다.
나를 힘들게 한 건 남편의 실수도 아니었고, 하루아침에 빚만 안고 바닥으로 주저앉은 나의 삶도 아니었다.
“내 아들이 네 아들 먹여 살리고 있잖니? 너희 친정에 말해서 1억원만 해 달라고 해라. 그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것 아니냐?”
너무도 당당히 말씀하시던 시어머님의 말씀에 조금은 쉽게 재혼을 선택한 것 같은 나의 행동에 화가 났고, 결혼준비며, 신혼살림 시작한 집이며, 당신 아들 사업자금까지 모두 준비한 나에게 아니, 아무 것도 모르는 내 아들과 나의 부모님을 가벼이 보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에구…새 아가! 네가 우리 아들 살렸구나. 고맙다”라고 말씀 하셨던 분이었는데…
나는 또 한번의 이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었는데, 그 결과가 이것 밖에는 안 되나?’
며칠을 머리 싸매고 누워 있을 때, 내 앞에 무릎을 꿇은 남편이 울면서 말했다.
“미안하다. 엄마 대신 내가 사과할게. 나도 엄마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에 화가 많이 난다. 엄마 생각이 틀렸다고 내가 이야기 할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한번만 더 믿어 주라. 내가 미쳤었나 보다. 한번만 더 믿어 보고 그때도 ‘아니다’는 생각이 너에게 들면 그때는 내가 널 편안하게 보내 줄게.”
그 놈의 정이라는 게 뭔지. 부모님. 아들 녀석. 눈물 흘리고 있는 남편. 두 번 이혼했다는 꼬리표를 달아야 할지를 고민 하던 나. 모두를 위해 나는 남편의 믿음을 다시 한번 선택했다. 남편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이삿짐 사장이었던 그가, 인부로 일을 나갔고, 저녁이면 대리운전으로 새벽까지 뛰면서 열심히 노력해 주었다.
신용회복지원으로 몇 년에 걸쳐 매달 조금씩 빚을 갚아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오면서 금전으로부터 조여 오던 숨통을 조금은 놓을 수가 있었다.
2004년 9월 15일 02시 59분.
예쁜 공주를 출산하였다.
그 동안 서먹서먹했던 시어머님과의 관계였었는데, 손주 산후조리를 해주시겠다며 오셨다.
“내가 나이 먹어서 잠깐 노망이 나서 너한테 모진 말을 했었다 보다. 미안하다. 내가 모진 말로 너에게 상처를 주고, 내 못난 아들이 너를 힘들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곁에 남아주어서 고맙구나. 이제는 너희들 행복만 생각하면서 잘 살아라. 그리고, ‘호주제 폐지 제도’란 게 생기나 보더라. 알아보고 애비 호적에 아이 올리도록 해. 그래야 네가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구나.”
서먹해 하는 아들 녀석을 안아주시며 눈물 흘리시는 시어머님의 눈물에는 감히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의미와 가르침이 담겨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때론 포기할 줄도 알고, 마음을 비울 줄도 알고, 서운함에 웃을 줄도 알아야 했다. 아직은 젊은 남편의 나이에 마냥 이삿짐을 나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평소 자동차에 관심이 많던 남편에게 자동차 정비 책자를 한 권 건네주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자기야. 나하고 잘 알고 지내는 언니 신랑이 차량정비소 사업을 하는데, 직원이 한 명 필요하대. 기술 배우면서 공부 한번 해 볼 생각 없어? 자기는 잘 할 거라 믿는데…”
자신을 믿어주는 나에게 고마워하면서도, 당장 50만원 정도의 수입이 줄어드는 이유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남편의 등을 밀어내 주었다.
빠듯한 살림에 50만원이라는 수입이 줄면서 아들 녀석의 학원을 먼저 끊었고, 아기의 일회용 기저귀며, 내가 조금만 힘들면 줄일 수 있는 지출을 막은 결과 세금을 제외한 금액 10만 원으로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억척 아줌마가 되었다.
10만원으로 애 둘을 키우며 생활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걱정하던 남편도 나의 이런 억척스러움에 말없이 금연에 성공해 주었다. 그 흔한 학원 하나 보내지 못하는 나의 마음은 아팠지만, 아들은 스스로 본인의 일에 최선을 다해주어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해 주었다. 5학년인 지금은 학급회장이 되어 남편과 나의 얼굴에 웃음을 안겨다 주는 착하고 의젓한 아들로 자라주고 있다.
재혼은 실패에 대해 미리 겁먹지 말아야 한다.
나 자신의 위치에 서서 흔들림 없이 최선을 다한다면 초혼 못지않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다. 부모님과 남편 공경하고, 절대로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나와 인생을 동행하는 남편이지만 나와는 다른 사람이기에 내 생각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 들여 맞추려 하지 말고, 남편은 절대 내가 아님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재혼이라는 나의 삶에 지나치도록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아주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면서, 항상 마음을 열어 의논하는 습관만 들인다면 아픔을 딛고 선택한 재혼이지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살면서 크고 작게 부딪히는 일들은 수없이 많다.
힘들 때마다 나의 선택을 비난하고, ‘현실을 포기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다’ 라는 생각은 가끔 할 수 있겠지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건강한 가정을 이루는 데에는 분명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하는 현명함이 필요하기에 난 나의 자리로 돌아와 제일 먼저 남편을 챙기는 지혜를 발휘하며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걸 배우며 살고 있다.
재혼을 한 지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더 많은 모험으로 많은 것을 배우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위치에서 열심히 노력해 주는 남편과 아이, 무엇보다 내 아픔을 먼저 챙겨주는 지금의 남편이 있으며, 그런 남편을 내가 사랑하고 있기에 지금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언제 까지나, 남편을 처음 만났던 날 그때를 기억하면 예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