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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상처 끝에 찾은 행복
2006-07-10
“엄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인 두 아이들이 옷을 단단히 입고 인사를 한다. 
"그래, 추운데 차 조심하고 잘 갔다 와.” 
내 나이 마흔 다섯. 남들보다 한참 늦었지만 두 아이들을 보면 가끔씩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한다. 

18년 전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몸이 빳빳한 게 잘 움직여지지 않고 입술도 뭔가 이상한 게 감각이 없었다. 평상시와는 다른 느낌에 깜짝 놀라서 황급히 병원으로 데려갔다. 진찰결과는 아! 뇌출혈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정말 앞이 캄캄한 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게 노인들한테 오는 그런 증상이 아직도 새파랗게 젊은, 이제 겨우 스물여덟밖에 안 된 내게 오다니. 그렇지 않아도 어릴 때 앓았던 소아마비 때문에 한 쪽 다리까지 절었는데 또다시 그런 형벌이 내려졌다. 뇌출혈로 한쪽 팔은 완전히 마비되고 한 쪽 다리는 전보다 더 절어야 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나에게 닥쳤던 불행을 말했고 앞으로 닥칠 뒤틀린 나의 기구한 인생의 전주곡이었다. 

그 일로 나는 심한 정신적 충격에 휩싸였다. 왜 내가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그런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멀쩡하던 한쪽 팔을 쓰지도 못하고 나머지 한 쪽 팔만 쓴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서 주부의 역할도, 아내의 역할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어 늘 부부싸움의 빌미가 되었다. 그런데 몸이 망가지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그 남자(전남편)는 나를 위로를 하기는커녕 상처만 주었다. 뒤틀린 나의 몸을 보며 ‘병신 같은 년’, ‘애도 못 낳는 년’ 등등 온갖 욕을 수시로 하고 나중에는 손찌검까지 했다. 그 남자가 아무리 욕을 하고 짓밟고 때려도 아무런 힘이 없었던 나는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의 구박보다 참기 힘든 건 그 집 식구들의 냉대와 구박, 그리고 멸시였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같이 산 지 1년이 넘도록 아이도 없던 내게 더 이상 희망을 없음을 안 그들은 이혼을 강요했다. 온갖 모욕을 이를 악물로 참다 결국 2년 만에 맨 몸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게 나의 두 번째 실패한 결혼이었다. 

첫 번째 이혼은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 가출했다 만난 남자와 아무 대책 없이 열여덟 살에 한 결혼이었다. 하지만 생각 없이 한 결혼이라서 그런지 나는 곧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나를 좋아했던 그 남자도 내가 어릴 때 앓은 소아마비로 한 쪽 다리를 저는 것을 트집 잡았다. 그리고 중학교도 못 나온 내게 무식하다며 구박을 하더니 나보다 더 배우고 더 건강한 여자를 찾아갔다. 첫 번째 이혼을 당했을 때는 내가 무모하게 선택한 거라 죄 값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물아홉 살에 두 번이나 이혼을 당하니 비참한 생각밖에 안 들었다. 결혼을 한 번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두 번씩이나 했으니 내가 복이 많은 건지, 아니면 팔자가 센 건지. 

  조그만 옷가방을 들고 친정 집으로 오자 어머니는 나를 잡고 울면서 말했다. 
  “무슨 년이 그렇게 팔자가 세냐?” 
친정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친정 식구들의 눈치를 보다 나는 또다시 방황을 했다. 못하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거리를 방황하며 되는대로 살았다.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몸이라도 성하면 혼자 독립해서 살겠지만 그런 몸으로는 어디 가서 혼자 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친정집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은 나는 가질 수 없는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다 자살을 기도했다. 하지만 그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방황을 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나에게 점점 다가왔다. 공장 일이 끝나면 우리 집 앞에 와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어쩌다 남편을 만나주면 몸이 불편한 나를 데리고 고수부지 잔디밭에 앉아서 데이트를 했다. 가벼운 주머니 때문에 찻집이나 식당에 한 번 못 들어갔지만 자판기에서 뺀 커피나 거리의 리어카에서 사 준 붕어빵이나 호떡이 참 맛있었다. 남들이 보면 웃음이 나올지 몰라도 내게는 가난하지만 진실한 마음을 주는 남편이었기에, 커피나 호떡 등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남편을 만나면서 나는 살고 싶다는 작은 불씨가 생겼다. 그리고 방황하면서 많이 마셨던 술도 끊고 담배도 끊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지나간 상처에 대한 부담 때문에 남편에게 쉽게 마음을 열기가 어려웠다. 이런 나에게 친정 식구들은 지나간 아픔은 잊어버리고 새 인생을 살라고 했다. 열심히, 성실히 산다면 지나간 과거를 숨기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친정 식구들의 위로와 충고, 그리고 남편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성격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런 사람이라면 또다시 실패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것 같은 유혹이 생겼다. 그렇지만 내 양심을 속이고 싶지 않아 남편에게 지난 아픔을 고백했다. 그러자 남편은 “나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하지만 아픔을 함께 나누며 남들처럼 오순도순 살고 싶어요.”라고 했다. 남편의 그 천사 같은 위로와 따뜻함에 나는 마음을 열고 미래를 약속했다. 

그 때 내 나이가 서른 두 살이고 남편은 나보다 여섯 살 많은 서른여덟이었다. 아무것도 모르시던 시부모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장가도 못 가고 늙을 줄 알았는데 장가를 가게 되었다며 오히려 내게 고맙다고 했다. 

비록 아직도 사글세를 면치 못하는 궁핍한 살림이지만 마음만은 편하다. 남편은 아직까지 나의 과거를 들추거나, 뒤틀린 육신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늘 따뜻하게 대해줬고 나를 감싸주었다. 나를 비웃거나 무시하지도 않고 오히려 내가 한 쪽 팔로 제대로 못하는 살림을 많이 도와주고 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김치 한 번 내 손으로 담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남편은 많은 배려를 해주고 있다. 또한 영원히 못 낳을 것 같은 아이도 지금은 남매를 두었다. 대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늦었지만 그래도 내게 두 아이들을 준 신에게 감사하며 살고 있다. 또한 내게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이런 행복을 안겨준 남편에게 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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