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현재 48살. 제 2의 삶을 도약하고 있는 주부입니다.
어린 시절. 제 부모님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전 고아원에 맡겨져 수녀원장님의 보살핌으로 유년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까지 고아원에서 자랐지요. 여자로서 혼자 고아원에 있기에는 너무 연약했나 봅니다. 매일 남자들의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고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삶이었습니다. 하루빨리 고아원을 나오고 싶은 심정이었고 이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아원을 나왔습니다.
달랑 짐 가방 하나 들고 나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일자리를 구하던 중 한 음식점에서 숙식을 제공받고 주방에서 일을 했습니다. 부모님 없이 저 혼자 생활비를 벌어가며 생활하기란 참으로 어렵더군요. 하루 12시간씩 서서 설거지와 청소를 하는 것은 차차 익숙해져 괜찮았지만 한 달에 2번 쉬는 날엔 갈 곳이 없어 많이 외로웠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 음식점에 온 한 손님을 만났습니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힘들 때 마다 저의 위로가 되어 주었기에 지친 저에게는 삶의 안식처였던 것이죠. 그 사람도 부모님이 안 계셨고 카센터에서 일하였기에 둘이서 함께 번다면 월세집 정도는 마련해 가정을 꾸리며 생활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동거. 하지만 제 생각과는 달리 그 사람은 함께 살고 나서 점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술에 취해 집에 오는 날이 잦았고 한번 시작된 손찌검은 제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사람으로부터 도망쳐야겠다 생각하고 몇 번을 집에서 나와봤지만 불러올 대로 불러온 배속에 아이를 받아줄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2년간의 동거를 끝으로 한 살배기 아이와 저만 남긴 채 집을 나가버렸고 월세 10만원 짜리 단칸방에서 아이와 저 단둘만이 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며 낮에는 공사판에 음식을 나르고 저녁에는 파출부를 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애까지 달려 있는 제가 다른 남자들에게는 쉽게 넘어올 여자로 보였나 봅니다. 여기저기 공사판을 기웃거리는 남자들뿐 아니라 식당에 찾아오는 손님들까지 저와 함께 살자며 온갖 여러 가지 물질과 마음으로 제 마음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그리고 또다시 올 것만 같은 배신감으로 섣불리 만남을 응하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제 나이 마흔넷. 얼굴에 깊게 패인 굵은 주름과 어려서부터 해온 잡일로 인해 두껍고 거칠어진 손을 볼 때마다 '아~이제 나도 꺾이고 있는 인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앞만 보며 가쁘게 달려온 지난 24년의 세월. 열심히 일한 대가일까요? 그 동안 조금씩 모은 돈으로 자그마한 음식점을 마련했고 단골 손님도 생겨 먹고 사는데 걱정 없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기꺼이 나를 희생하며 살아왔던 젊은 날의 초상화가 새록새록 떠오르며 이제부터라도 나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아봐야 될 것 같은 여유로움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너무나 가고 싶어했던 대학도 들어가고 주말에는 인근 도서관에 가 책도 읽으며 삶의 양식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음식점을 경영하고 저녁에는 야간대학을 다니고 있었기에 몸이 12개라도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지금 이대로 만이라도 '난 행복한 사람이다'라 생각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저를 보며 사별하시거나 혹은 이혼하신 분을 소개시켜 주려 하셨지만 너무 부담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어느덧 멋진 성년이 되어 대학생활을 하고 여자친구도 사귀며 엄마와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어 보였고 저 또한 행복해 보이는 아들 앞에서 엄마의 외로움을 알아달라고 말할 자신이 없더군요. 언젠간 자식도 내 품을 떠나기 마련인데 어느덧 훌쩍 커버린 아들이 군대를 가고 나니 혼자 살기 많이 외로웠습니다. 하지만 나이 마흔이 되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쑥스럽고 조심스러운 일이었기에 섣부른 만남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난 커서 꼭 좋은 남편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갈 거야' 라며 친구들과 서로의 이상형에 대해 묻곤 했던 기억이 꼭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 옛날 기억이 씁쓸한 미소만을 남기게 되더군요. 재혼은 나와는 상관없다라고 생각하며 바쁘게 생활하고 있던 중 생각지 못한 곳에서 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났습니다.
늦은 나이 야간대학을 다니던 시절. 제 사정을 아시고 몇 번의 지각도 눈감아 주시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시던 교수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저보다는 5살 연상으로 10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자식이 둘이 있지만 모두 결혼을 한 후 해외로 나갔기에 그분도 저처럼 많이 외로우신 분이셨지요. 사랑이란 이름 아래 아픔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바라봐야 했던 교수님. 저희는 쉽게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로를 존경하며 배려하는 마음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진전된 관계를 갖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지켜나갔습니다.
그렇기를 3년. 47세 늦은 나이에 그토록 원하고 원하던 학사모를 머리에 쓰게 되어 기뻤지만 한편으로 더 이상 교수님을 뵙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동반된 슬픈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습니다.
'왜 이러지. 아니야. 이건 아니잖아. 이러면 안 되는 거지. 지금의 나이에 무슨 재혼. 태어나서도 혼자인 인생, 죽어서도 혼자일 텐데 무슨 헛된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차리자! 마음을 가다듬고…….'
하루에 열두 번도 아니 수십 수백 번도 안 된다고 다짐했지만 이미 제 마음은 제 것이 아니더군요. 마음을 다해 부르면 상대에게도 그 마음이 전달된다고 누가 그랬던가요? 몇 날 며칠을 잠 못 이루며 고민하던 중 우연히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저는 많이 놀랐습니다.
우린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을 하고는 편한 관계로 만났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만남이 잦을수록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기에 저희는 5개월간의 만남을 끝으로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자식 내외의 적극적인 후원과 권유로 저희는 2005년 11월 05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교수님과 저. 한번의 결혼 실패, 그리고 사별이란 아픔이 있기에 서로 보듬어 주고 감싸주며 서로를 이해하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저의 생일이 있어 저희 부부는 가까운 수목원에 놀러 갔습니다. 워낙 꽃과 나무를 좋아하기에 그곳에 가 바람도 쐬고 집에서 싸가지고 간 김밥과 과일을 먹으며 태어나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습니다. 사십 평생을 행복이란 글자를 잊은 채 살아왔습니다. 중간중간 삶에 기쁨이란 있겠지요. 하지만 행복은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쁘고 당신도 기쁘고 모두가 기뻐야 그것이 바로 행복 아닐까요?
교수님께서는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저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말을 자주 하십니다. 부시시한 머리로 자글자글한 주름이 한가득한 얼굴인데도 그는 아름답다고 사랑한다고 매일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한다는 말. 그런 말이 있었는지조차 잊고 살았던 지난 세월. 이제는 남은 여생을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고 살기 원합니다.
만약 지금 곁에 좋은 사람이 있는데도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이 두려워 혹은 또다시 실패에 대한 걱정으로 고민하고 계신다면 전 그분들께 말하고 싶습니다. 두려움은 지금의 현실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들고 결단은 앞으로의 인생을 더 나아지게 만든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무쪼록 저의 수기가 현재 재혼을 앞두고 고민하시는 분이나 혹은 두려움에 떨고 계신 분들께 조금이나마 작은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