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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얻으려면 나를 버려야...
2006-07-10
‘ 재혼 성공담’ 하면 흔히 실패 없는 결과만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여전히 길을 걷고 있고, 이 길에 대한 확신은 장담할 수 없다. 여자들은 대부분 첫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으로 두 번 다시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둘째 아이를 갖는다. 왜 그럴까? 몇 년 전의 다짐을 잊은 건 아니지만, 당시의 극렬했던 고통을 지금은 같은 농도로 느낄 수 없어서 다시 한번은 참아낼 수 있을 거라는 자기 합리화 때문은 아닐까?   

재혼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사별이든 이혼이든 우리는 당시의 아픔과 고통을 잠시 잊고, 새로운 시작을 생각한다. 새로운 사람과의 길은 예전과 다를 거라는 막연한 환상과 함께 자기 최면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외로우니까, 등을 기댈 등받이가 필요하니까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는 남편과 대형 마트에 가서 카트를 밀고 다니면서 물건을 툭툭 던져 넣을 때 행복을 느낀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지만 사람들과 섞여서 사는 사소한 행복감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동질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어제 밤 귀가 길에 나는 뒤차와 가벼운 접촉 사고가 났다. 사고 운전자는 여자였고, 그 여자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나 역시 남편에게 빨리 와 달라는 전화를 걸었다. 남편들이 왔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왜 우린 남편을 제일 먼저 떠올릴까? 내가 만약 10년 전에 이런 사고가 났다면 난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와 달라고 했을까? 12살짜리 아들? 60세가 넘은 친정 엄마? 아니면 토요일 밤을 가족과 있을 친구들? 글쎄 모르겠다. 

정말 기가 막히게 사소한 일상에서 우린 남편의 부재에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소위 기둥 서방도 필요악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사는 것이 일생일대의 행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불행한 결혼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재혼의 실패가 더 큰 인생의 위기를 낳는 것도 사실이다. 혼자 사는 삶이 보람 있고, 자기 성취감이 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고자 한다. 수행하는 스님, 성자, 신부님, 수녀님 등등 이런 분들이 얻은 득도의 이면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고통과 고뇌가 함께 있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은 짝을 찾는 것이 세상의 반을 얻는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만남을 기대한다. 

첫 남편과의 사랑은 3년을 넘지 못했다. 남편은 아들을 얻은 기쁨이 가시기 전에 새로운 여자를 얻었다. 내겐 내가 책임져야 할 친정 엄마와 돌 지난 아들밖에 없었다. 나는 자존심을 접고 남편에게 매달렸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그러나 지금은 안다. 아니 남편을 이해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감정은 일방적일 수 있음을, 그 감정은 상대방의 실수나 잘못이 아니라 사람 자체라는 것을 말이다.

남편과 헤어지고 혼자 산 세월 10년. 그리고 재혼 후 지금까지 10년.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 양팔 저울에 단다면 무게는 어떨까. 그 답을 나는 할 수 없다. 카트를 밀면서 느끼는 일상의 감정, 접촉 사고 후 남편에게 하는 전화 한 통의 행복을 얻기까지 나는 너무 힘든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남편을 만난 건 11년 전 어느 포장 회사에서였다. 나는 대학을 나왔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서 비정규직으로 옮겨 다니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 중장비 운전 기술을 배워서 자격증을 땄고, 이곳 저곳에서 현장 경험을 쌓은 후에 자동차 회사에서 용역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박봉이라서 겨우 밥벌이만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남편 회사 사장이 자동차 회사에 들렀다가 지게차 기사가 여자인 것을 보고 자기네 회사로 와 달라고 했다. 나는 현재 받는 월급의 20%쯤 더 받는 조건으로 회사를 옮겼다. 

남편은 포장 회사에서 생산직 사원으로 일하는 노총각이었다. 그곳은 자동차 회사보다 작업 환경이 열악했다. 우선 현장이 자갈밭이어서 지게차를 운전하기에 힘들었고, 작업량도 많았고, 먼지도 많았다. 자동차 회사에서 단순한 작업만 하다가 갑자기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저녁이면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머리카락은 손가락을 빗어도 빗질이 안 될 만큼 먼지로 엉켜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남편 없이 혼자 산 세월 10년의 후유증이라고 해야 하나? 

여자가 혼자 산다고 하면 60세가 넘은 할머니한테도 남자가 꼬인다고 하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생산직 부장도 슬슬 농담을 걸어왔고, 사장도 저녁을 사준다는 등의 명목으로 자신의 차에 동승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럴 즈음 노총각이었던 지금의 남편이 나에게 관심을 보여 왔다. 밥을 먹자고 하던가, 만나자는 말을 할 만큼 숫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내가 미숙한 솜씨로 물건을 내리다가 엎는 경우 제일 먼저 달려와서 수습을 해주는 사람이 그였고, 일의 양이 많아지면 슬그머니 나대신 지게차 작업을 빠르게 해준 사람도 그였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차량을 운전해주는 일도 그가 했는데, 마지막으로 나를 내려주기 위해 일부러 다른 사람들을 먼저 내려주는 사람도 그였다. 어쩌다가 점심 외출을 하고 오면 주춤거리면서 어디 갔다 왔느냐고 불안한 눈빛을 보이는 것도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자신의 이모가 노래방을 개업하는데 같이 가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마침 일요일이었고, 그간 그가 보여 준 호의가 고마웠기 때문에 보답하는 의미로 흔쾌히 허락을 했다. 그러나 내가 간 곳은 노래방이 아니라 이모님의 환갑 잔치였고, 그 자리에는 그의 가족 모두가 나와 있었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내가 그를 안 지는 불과 서너 달도 되지 않았고, 나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잘 왔다. 아가.” 
어떤 노인 분이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느닷없이 말했다. 그 손은 농촌 여인의 손답게 투박하고 거칠지만 따뜻하고 정감이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날 뻔 했다. 결혼 생활이라야 겨우 3년을 넘기지 못했는데, 더구나 아이 아빠는 고아였기 때문에 시댁의 존재가 무엇인지 몰랐던 내게 그 분이 잡아 준 손의 의미는 무척 크고, 고마웠다. 세상의 편견을 깨는 손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그렇게 결혼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고, 아침이면 그를 배웅하며 보통의 여자들처럼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가난한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와의 짧은 만남과 갑작스런 결혼,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전에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다행히 나의 아들과는 별다른 충돌 없이 잘 지내게 되었지만, 그는 알코올에 거의 중독되어 있는 상태였다. 일년이면 360일을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학력도 시골 중학교 졸업이 고작이었다. 나는 내 운명을 저주했다. 내 경솔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머리를 찧고 싶을 만큼 후회하고 있었다. 

그는 음주 운전으로 사고를 내고, 경찰서에 갇혀 있기도 했고, 술에 취해 욕실에서 벌거벗고 쭈그려 앉아서 자기도 했으며, 장롱을 화장실인 줄 알고 오줌을 누기도 했다. 추운 겨울에 소방서 앞 의자에서 자다가 순찰 돌던 경찰에게 발각되어 집으로 오기도 하고, 회사에서 술 마시고 일을 하다가 절단기에 손가락이 잘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출장을 가서 직장 상사와 말다툼 끝에 술을 마시고 여관에서 과도를 빌려서 상사의 복부를 찔렀던 것이다. 직장 상사는 6주 진단으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고, 그는 구속 수감되었다. 나의 절망은 폭포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고 싶었다. 시어머니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습을 찔렀다. 
“아니, 걔가 왜 그런다냐? 걔가 원래는 착한 아이였는디...니가 무신 약 먹였냐?” 
 아무리 시골에서 낳고 자라고 시집가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해도 며느리에게 할 말이 있고, 못 할말이 있는데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그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먼지만큼 남아 있던 연민마저 훌훌 날아가 버렸다. 그는 구제 불능의 알코올 중독자에 배운 것 없고, 더구나 가난한 시골의 장남일 뿐이었다. 나는 그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면회실에서 만난 그의 몰골은 초췌했고,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묻는 첫 마디는 뜻밖에 아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들이 자신의 엄청난 죄를 아느냐는 것이었다. 모른다고 하자, 고맙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단호하지 못해서 이혼을 감행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시 혼자가 되어 긴 터널을 홀로 가게 될 나의 노후가 불안했는지도 모르고,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홀로 설 수 없는 현실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나의 감정에 충실하지 못했다. 감정은 수시로 변하는 것.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긴 세월이다. 그 긴 시간을 나와 그는 함께 했다.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참으로 궁색하게 길어질 것이다. 정이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삶이 행복의 정도나 기준이나 잣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군가와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하는지는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다. 

굳이 내 성공의 비결을 묻는다면 나는 진지하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나와 같은 사고방식, 나와 같은 생활 습관, 나와 같은 이상을 가진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믿음을 버려라. 결혼이란 어쩌면 나와 정반대의 사람과 가는 또 다른 여정이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 나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란 눈에 보이는 것만 인식하게 되어 있다. 재혼이든 초혼이든 결혼이란 낯선 사람과 만나서 나를 적당히 버리고 타인을 적당히 받아들여야 가능한 생활이다. 섣부른 시작이었어도, 결론만큼은 신중히 내려야 하는 인생의 중대사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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