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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처와 허물을 덮어준 고마운 사람
2006-07-10
 많은 좌절과 절망, 슬픔들이 희망으로 바뀌기까지의 과정들을 되뇌며 지금부터 나의 재혼성공스토리를 써볼까 한다.

 철없던 시절, 열아홉 살에 한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평범한 주부로 살던 내게 행복은 잠시 뿐. 곧 불행이 들이닥쳤다. 결혼해서 살면서 남편은 외박과 술자리가 잦았다. 하다 못해 임신하여 만삭인 몸으로 합의금을 마련하려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던 날도 있었다. 아이가 점점 크는데도 불구하고 아빠 노릇 한번 하지 않고, 날이 갈수록 남편의 행동은 점점 심해졌다. 카드 빚이 점점 쌓여갔다. 
 
 그것도 모자라 그 사람은 이혼을 해달라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매달려 보고 빌기도 했다. 뭘 잘못 하지도 않았는데 바보같이 말이다. 그러나 끝내 그 사람은 냉정히 가버렸고 나한테 남은 건 애 딸린 이혼녀라는 낙인 뿐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건 이혼한지 1년 만에 다시 그 사람이 돌아왔다. 아무리 못나도 아이아빠라는 생각과 시간이 지나 조금은 달라졌을 거란 내 바램으로 우린 다시 재결합을 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왜 나한테 돌아온 건지 난 알 수 없었다. 반복되는 이전의 생활들. 끝내 재결합한지 2년 만에 우린 다시 이혼을 하게 되었다. 난 양육비, 위자료 한푼 못 받고 이혼을 하게 되었다. 아이와 달랑 남겨진 나. 다시 내가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이 아이와 살아갈지 나이 어린 나로선 막막하기만 했다. 홀로 계신 엄마에게 너무도 미안함 마음뿐이었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한동안 술에 절어 폐인같이 지내게 되었다. 집밖으로 나가면 마치 다른 사람들이 내가 이혼녀라는걸 알아볼까 두렵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갈수록 가진 돈은 바닥나고 생계가 막막해 지기 시작했다. 이래선 안되겠다는 맘을 갖게 한 건 우리 딸 아이. 발음도 제대로 안 되는 그 말투로 엄마 힘내라는 말 한마디가 날 다시 일어서게 한 계기가 되었다.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유통업에서 일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과 접하게 되었고 일하는 그 순간만큼은 아프지 않았다. 그러다 거래처에서 한 남자를 알게 되었고 동갑인 그 사람과 나는 그저 그냥 친구처럼 지내자는 생각으로 편안하게 만남을 갖게 되었다. 물론 그 사람은 내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였다. 그 사람은 집이 대구고 난 경기도여서 가끔밖에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요즘 시대가 너무 좋아졌다. 인터넷으로 서로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린 항상 그런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그냥 그렇게 친구로만 지낼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일이 한 통 왔다. 이젠 친구가 아닌 연인이고 싶다는. 한편으론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슬펐다. 그런 관계로는 다가갈 수 없기에……. 어떤 남자가 애 딸린 이혼녀를 받아줄지, 그것도 총각이 말이다. 나 역시 좋아하는 맘이 굴뚝 같았지만 이젠 만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내 생각만 하며 살 순 없기에 자꾸 만남을 회피하니 그 사람이 직장으로 찾아왔다. 난 솔직히 다 털어 놨다.  아이가 있고 이혼을 했다고, 그것도 한남자랑 두 번이나……. 난 눈물만 났다. 내가 이혼녀만 아니었어도 나도 네가 좋다고,  우리 잘 한번 사귀어 보자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이혼녀라는 이유로 난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말만 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 사람. 그냥 그 자리에서 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다시 절망감이 느껴졌고 내 신세를 한탄하며 그렇게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다. 

 근데 누군가가 손수건을 건네 주며 툭툭 치는 게 아닌가. 마스카라가 다 번진 눈으로 보니 그 사람이 다시 왔다. 울지 말라며 꽃다발을 한아름 안겨주었다. 그리고 다 알고 있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화상으로 만나던 우리. 내 옆엔 우리 꼬맹이가 항상  왔다갔다 하더란다.  혼자 산다더니 왠 아이일까 했는데 물어보나마나 조카겠지 싶었단다. 아이가 내 나이에 낳았다고는 생각을 못했다나.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그만 헤드셋에 있던 마이크를 켜놓은 채로 슈퍼를 다녀온 사이 우리 꼬맹이가 막 얘기를 하더란다. ‘우리 엄마가요, 지금은 슈퍼에 갔어요’ 하면서 막 이런저런 말을 주절주절 마이크에 대고 떠든 것이었다. 그런 내용을 알면서 왜 물어보지 않았냐고 하니 물어보면 내가 또 상처 받을까 봐 그냥 짐작만 하고 있었고 만나서 대화를 하려 했다고 한다.

 이렇게 우린 만남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흘러 어느덧 아이도 이 사람을 아빠라고 따르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이 아이에게 자기가 아빠라고 인식을 시킨 것. 점점 날이 갈수록 너무 고맙고, 이젠 좋아하는 감정이 아닌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무렵 그 사람에게 시련이 닥쳤다. 아버지가 병석에 누우신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며느리가 보고 싶다고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나 보다. 얼마 못 사신다는 아버지에게 만약 그 사람이 나하고 결혼이라도 한다고 한다면 그 충격은 말도 못할 텐데 싶었다. 이젠 정말 헤어져야 되나 싶기도 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이 사랑하는 감정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준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그 사람에게 그렇게 말을 하니 나와 딸아이를 무턱대고 데리고 가는 곳이 바로 병원이었다. 난 못 들어 간다고 뿌리쳤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아버지한테 다 말했다고 했다. 용기를 내어서 입원실로  들어가니 아프신 아버지가 반갑게 나와 내 딸을 맞아주시는 게 아닌가. 우리 딸아이가 ‘누구야?’ 하고 물으니 ‘할아버지란다’ 하면서 꼬옥 안아주셨다. 호통을 치시고 쫓아내도  아무 할말이 없는 나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맞아 주시는 아버지. 그 고마움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버님 말씀이 이렇게 만난 것도 다 하늘의 뜻이고, 이렇게 만날 인연이라며 안 좋았던 기억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이 사람하고 좋은 날만 많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날 따스하게 맞아주시던 아버님.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다. 

 이렇게 혼자가 되어버린 그 사람과 아버님의 뜻에 따라 우린 결혼을 하게 되었고, 지금 내 안에 우리 사랑의 결정체가 자라고 있다.. 이 아이도 아버님이 주신 선물이라 생각이 든다. 지금은 결혼한지 1년째. 마냥 좋기만 한 날만 있는 것도 아니다.. 여느 부부가 그렇듯 부부싸움도 하고, 풀기도 하고 하면서 그렇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재혼! 생각 해보면 너무도 많은 게 걸림돌이 되고 한편으론 또다시 똑같은 삶을 살까 걱정도 되기도 한다. 아니면 그전보다 더 못한 삶을 살수도 있다.  하지만 절망보단 희망이 더 많이 보인다. 상처받은 사람이란 걸 알고 결혼을 한 것이라 그런지 우리신랑은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내가 싫어하는 건 웬만해서는 안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나 역시 이런 모습이 너무 고마워서 함부로 화를 안내게 되고 조심하게 된다.

 재혼! 사람들한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창피해 하고 숨겨야 되는 부분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두 번의 이혼을 하게 된 건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위한 시련이었다는 생각으로 너무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지금도 아픔을 겪고 계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이 되고자 글을 쓴다. 모두 행복한 가정을 꾸리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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